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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다 사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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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라다 사노스케는 1840년 이요 마쓰야마에서 태어난 인물로, 에도에서 하인으로 일하다가 신선조에 합류하여 10번대 대장을 맡았다. 그는 세리자와 카모 암살, 이케다야 사건 등 신선조의 주요 임무에 참여했으며, 보신 전쟁에서 쇼기타이에 합류하여 우에노 전투에서 전사했다. 사카모토 료마 암살 연루설이 제기되기도 했으며, 다혈질적인 성격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하라다는 소설,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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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다 사노스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다른 이름휘: 충이치
출생1840년
출생지이요-마쓰야마 번, 일본
사망1868년 7월 6일 (29세)
사망 장소우에노, 에도, 일본
배우자하라다 마사 (1865년 결혼, 1868년 7월 6일 사망)
자녀하라다 시게루 (아들)
경력
소속로시구미 (이전)
미부 로시구미 (이전)
신센구미 (이전)
세이헤이타이 (이전)
쇼기타이
복무 기간1863년–1868년
참전이케다야 사건
산조 세이사쓰 사건
아부라노코지 사건
보신 전쟁
도바-후시미 전투
고슈-가쓰누마 전투
우에노 전투
기타 정보
묘소불명
계명쇼요엔뉴 교시 (쇼요엔뉴 신시)
가족 정보
부모아버지: 초지
형제자매한지

2. 생애

하라다 사노스케는 이요마쓰야마 번(현재의 마쓰야마시) 출신의 낮은 계급 무사(츄겐)였다.[1] 호조인류 창술의 달인으로, 검 대신 창을 주무기로 사용했다.[2] 마쓰야마에서 할복하는 법을 모른다고 놀림받자 실제로 할복을 시도하여 살아남았고, 훗날 신센구미 동료들에게 이 흉터를 자랑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

1863년, 곤도 이사미와 함께 로시구미에 참가하여 교토로 상경했다. 로시구미 해산 후 미부 로시구미(후의 신센구미)를 결성하고 10번대 대장을 맡았다.[2] 타니 산주로를 신센구미에 소개하기도 했다. 교토에서는 스가와라 마사와 결혼하여 아들 시게루(茂)를 얻었다.[2] 히지카타 도시조의 신임을 받아 세리자와 카모 암살, 이케다야 사건 등 주요 임무에 참여했다.

1867년 하타모토가 되었으나,[4] 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곤도 이사미와의 의견 차이로 나가쿠라 신파치와 함께 신센구미를 탈퇴, 세이헤이타이를 결성했다.[7][9] 이후 쇼기타이에 합류하여 우에노 전투에 참전했다가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10]

2. 1. 출생과 성장

하라다 사노스케는 1840년(덴포 11년) 이요 마쓰야마번(현재의 마쓰야마시)에서 낮은 계급의 무사인 츄겐 신분으로 태어났다.[1] 아버지의 이름은 나가쓰구였으며, 어머니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성장 후, 하라다는 중간이 되었지만, 안세이 시대에 에도로 가서 마쓰야마 번사 나이토 후사노스케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했다. 하인은 중간 중에서도 어느 정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맡았으며, 훗날 영리하다고 평가받는 하라다는 그에 걸맞은 교양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라다는 호조인류 창술을 연마했으며, 마쓰야마에 머무는 동안 마쓰야마 번사로부터 할복하는 방법을 제대로 모르는 농민 취급을 받기도 했다.[2] 이에 하라다는 즉시 칼을 뽑아 할복을 시도했지만, 상처는 얕아 목숨을 건졌다.[2] 훗날 하라다는 신센구미 동료들에게 자신의 흉터를 자랑했으며, 이 사건은 그가 선택한 가문의 문장(원 안에 가로선, 즉 '1'의 한자를 묘사한)의 기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2]

어린 시절 하라다는 하이쿠 시인 나이토 소코와 친하게 지냈다. 소코는 훗날 사담회에서 하라다가 중간 동료들에게 제재를 받는 모습을 목격한 일화를 이야기했다. 하라다는 술에 취해 돌아와 거친 행동을 보였고, 이를 윗사람이 제지했지만 오히려 맞받아쳤기 때문에 벌을 받게 된 것이었다.[15]

얼마 후, 하라다는 마쓰야마로 돌아가 번교 메이쿄칸의 조교를 맡고 있던 나카지마 하야타의 와카토로서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 후, 소코는 마쓰야마 성 아래에서 하라다가 란식 총대에 사용하는 북을 울리며 알몸으로 다니는 기행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후 하라다는 가출하여 마쓰야마를 떠나 오사카로 향했다. 그는 타니 산쥬로, 만타로 형제의 도장에 입문하여 종전류 창술 면허를 받았다. 그 후 에도로 가서 곤도 이사미의 시위장에서 수련했다.[3] 다만, 나가쿠라 신파치의 회고록이나 코지마 시카노스케의 기록에는 하라다의 이름이 없어, 시위장과의 접촉 기간은 짧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6]

2. 2. 신센구미 입대

1863년, 하라다는 곤도 이사미 및 시에이칸 관련 인물들과 함께 기요카와 하치로의 로시구미에 합류하여 교토로 갔다. 교토에 도착한 직후 로시구미는 해산되었고, 대부분의 구성원은 에도로 돌아갔다. 그러나 하라다, 곤도, 세리자와 카모 등 몇몇은 교토에 남아 미부 로시구미를 결성했고, 이는 후에 신센구미가 되었다.[2]

이후 하라다는 신센구미 10번대 대장이 되었다. 그는 타니 산주로 도장에서 잠시 훈련받았고, 타니를 신센구미에 소개했다. 1865년, 타니는 7번대 대장이 되었다. 교토에서 하라다는 스가와라 마사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니시혼간지 근처에 가정을 꾸렸다.[2] 부부는 아들 茂|시게루일본어를 낳았는데, 하라다는 쇼군 이에모치|이에모치일본어의 이름에서 따왔다.[2] 하라다는 부장 히지카타 도시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세리자와 카모 암살, 우치야마 히코지로 암살, 이케다야 사건, 산조 세이사츠 사건 등 신센구미의 주요 임무에 참여했다.

1867년 6월, 하라다는 다른 신센구미 대원들과 함께 하타모토가 되었다.[4]

2. 3. 주요 활동

하라다는 1863년 곤도 이사미를 비롯한 시에이칸(試衛館) 동료들과 함께 로시구미에 합류하여 교토로 갔다. 로시구미 해산 후에는 교토에 남아 미부 로시구미를 결성했고, 이는 나중에 신선조가 되었다. 하라다는 신선조에서 제10번대 대장을 맡았다.[2] 타니 산주로의 도장에서 훈련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타니를 신선조에 소개하기도 했다.[2]

교토에서 하라다는 스가와라 마사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고, 아들 시게루(茂)를 얻었다.[2] 신선조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의 신임을 얻어 세리자와 카모 암살,[2] 우치야마 히코지로 암살, 이케다야 사건, 산조 세이사츠 사건 등 주요 임무에 참여했다.

1867년 6월, 하라다는 신선조와 함께 하타모토가 되었다.[4] 사카모토 료마 암살 용의자로 지목되기도 했으나, 미마와리구미의 사사키 타다사부로 등이 암살했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불분명해졌다.[5][6] 아부라노코지 사건에도 참여하여 고료에지 잔당을 제거하는데 가담했다.

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에 참전한 후, 甲陽鎮撫隊|고요 친부타이|일본어에 소속되어 고슈-카츠누마 전투에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이후 곤도와의 의견 차이로 나가쿠라 신파치와 함께 신선조를 탈퇴하여 세이헤이타이를 결성했다.[7][8][9]

하라다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 참가, 고슈-카츠누마 전투 패배

|-

|

| 신선조 탈퇴, 세이헤이타이 결성

|}

2. 4. 결혼과 가정

하라다는 교토에서 스가와라 마사라는 현지 여성과 결혼했고, 니시혼간지(西本願寺) 근처에 개인적인 가족 거주지를 잠시 두었다.[2] 부부는 아들 茂|시게루일본어를 낳았는데, 하라다는 쇼군 이에모치|가모일본어의 이름에서 두 번째 글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2]

신선조가 서본원사의 북 집회소로 둔소를 옮긴 게이오(慶応) 원년 3월 10일경, 하라다는 상인의 딸인 스가와라 마사와 결혼하였다. 당시 마사는 18세, 사노스케는 26세였다. 사노스케는 서본원사 바로 남쪽에 위치한 곳에 신거처를 마련하고, 검은 목면의 몬츠키에 고쿠라의 말타기 하카마를 입고 그곳에서 둔소로 다녔다고 한다.

결혼 다음 해, 사노스케는 아들이 태어났다. 사노스케는 아이에게 '시게(茂)'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매우 기뻐했다. 아들의 이름 '시게루(茂)'는 에도 막부 14대 세이이타이쇼군도쿠가와 이에모치에게서 한 글자를 따온 것이라고 전해진다.[26]

아내 마사(오케이)는 1930년까지 생존했으며, 많은 손자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5. 보신 전쟁과 최후

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하라다 사노스케는 신선조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나, 구 막부군은 패배하여 후퇴하였다. 이후 오사카를 거쳐 에도로 이동하였다.[24]

곤도 이사미가 결성한 고요 진무대에 참가했지만, 나가쿠라 신파치와 함께 의견 차이로 결별하였다. 이후 나가쿠라 신파치와 새로운 부대인 세이쿄대(靖共隊, 정공대)를 결성하여 부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에도 개성으로 인해 세이쿄대는 분열되었다.[24]

분열 후, 하라다 사노스케는 간에이 사를 중심으로 한 구 막부 세력의 쇼기대에 합류하여 우에노 전쟁에 참전했지만, 전투 중 총상을 입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했다. 쇼기대 참여 시기가 늦어 명부에 하라다 사노스케의 이름이 없고, 묘소 위치도 알려져 있지 않다.[24]

하라다가 1868년에 사망하지 않고 살아남아 중국으로 건너가 마적단의 두목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12]청일 전쟁 당시 한 노인이 일본 제국 육군을 도왔고, 자신이 하라다 사노스케라고 주장했다는 보고가 1965년 한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지만, 사실로 확인되지는 않았다.[7]

3. 평가 및 논란

하라다 사노스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야기 타메사부로는 "하라다는 성미가 급하고 다혈질이었지만 좋은 남자였다"고 평가했다.[18] 반면, 나이토 메이세키는 "영리하고 용모가 뛰어난 미남이었다"고 평가했다.[15]

하라다는 1867년 사카모토 료마 암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기도 했으나, 1870년 이마이 노부오의 자백으로 미마와리구미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사건 초기에는 신선조가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았는데, 현장에 남겨진 칼집과 나막신, 나카오카 신타로의 증언 등이 그 이유였다. 특히 아베 주로는 나카오카 신타로가 증언한 암살범의 목소리가 하라다의 목소리와 매우 비슷하다고 증언했다.[15]

3. 1. 긍정적 평가

야기 타메사부로는 原田|하라다일본어는 성미가 급하고 다혈질인 남자였지만, 두 마디만 하면 '베어라 베어라'라고 외쳤지만, 이 또한 좋은 남자였다고 평가했다.[18] 나이토 메이세키는 꽤나 영리한 남자였고, 또한 용모가 뛰어나 아이의 마음에도 미남이라고 인정했다.[15]

3. 2. 부정적 평가

하라다 사노스케는 성미가 급하고 다혈질적인 면모를 보였다. 야기 타메사부로는 "두 마디만 하면 '베어라 베어라'라고 외쳤지만, 이 또한 좋은 남자였다"고 평가했다.[18]

3. 3. 사카모토 료마 암살 연루설

1867년 12월 10일, 사카모토 료마나카오카 신타로가 암살되었는데, 한때 하라다는 암살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기도 했다.[5] 사건의 진실은 불분명하지만, 1870년 도쿠가와 가신 이마이 노부오의 자백에 따르면, 암살자는 하타모토 사사키 타다사부로 휘하의 미마와리구미 (도쿠가와 관련 부대)의 사람들이었다.[6]

게이오 3년 11월 15일, 교토 오미야에서 도사번사카모토 료마나카오카 신타로가 암살당하는 사건(오미야 사건)이 일어났다. 메이지 시대에 견회조 소속 이마이 노부오의 자백으로 현재는 견회조의 범행으로 확정되었지만, 사건 초기에는 실행범으로 신선조가 가장 먼저 의심받았다.

의심받은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현장에 남겨진 칼집과 두 짝의 나막신
  • 사건 직후 나카오카 신타로의 증언 ("코나쿠소"라는 중국·시코쿠 지방 사투리 사용)


오미야 주인 신스케에 따르면, 나막신에는 "효테이"라는 각인이 찍혀 있었고, 효테이에 확인한 결과 사건 당일 신선조 대원에게 빌려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신선조에 대한 의심이 커졌다. 그러나 게이오 정묘 필기에는 한 짝은 기온 니켄차야의 "나카무라야", 다른 한 짝은 시모가와라의 "소소도"라는 요리집의 것이었다고 적혀 있다. 사건 초기 현장은 혼란스러웠고, 많은 도사번사들이 달려왔기 때문에 도사번사의 것으로 추정된다. 나막신은 후대에 들어와 하나의 이유로 자주 언급되지만, 당시에는 단서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나막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칼집이야말로 진정한 범인의 유류품이었다.

사건 직후 오미야에 달려온 다나카 미쓰아키에 따르면, 이토 가시타로오미야를 방문하여 그 자리에 떨어진 칼집을 보고 신선조의 것이라고 증언했다고 하지만, 이토가 이 때 오미야에 달려와 그런 중대한 증언을 했다는 기록은 다나카 미쓰아키의 것뿐이다.

사건 직후 오미야를 방문한 도사번사 타니 간죠는 아부라코지 사건의 잔당인 고료에지들에게 칼집 감정을 의뢰했다. 고료에지들은 고심 끝에 하라다 사노스케의 칼집이라고 증언했지만, 실제로 증언한 사람 중 한 명인 아베 주로는 도사 사람들이 목소리로 신선조임에 틀림없다며 조사를 하러 왔다고 한다.[15] 그러나 칼집에 특별한 특징이 없다면 사노스케의 것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가장 중요한 단서는 습격당한 나카오카의 증언("중국·시코쿠 억양의 목소리")이었을 것이다. 아베는 그 목소리가 사노스케와 매우 비슷했기 때문에 사노스케일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고 말했다. 목소리는 재현할 수 없으므로, 이는 사노스케가 이요벤을 사용했다는 점과 연결된다. 타니 등은 칼집도 제시했지만, 아베의 기억에 남은 것은 "목소리"였다. 칼집에 증거 능력이 없고, 사노스케에게 도달한 것이 목소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타니가 칼집을 증거로 삼은 것은 목소리라는 실체 없는 증거의 취약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3]

4. 대중문화 속 하라다 사노스케

하라다 사노스케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모에요 켄》과 《신선조 혈풍록》에 등장한다.[13]

NHK 대하 드라마 시리즈 《신선조!》에서는 배우 야마모토 타로가 하라다 사노스케를 연기했다.[13]

애니메이션 시리즈 《피스메이커 쿠로가네》와 이를 원작으로 한 만화 《신선조 이문 PEACE MAKER》, 《피스메이커 쿠로가네》에도 등장한다. 그 외에도 《바람의 검심》(만화), 《하코다테 요진 부라히초 히메가미》(만화), 《겟츠메이 세이키》(만화), 《막말 연가 신선조》(비디오 게임 시리즈)에도 등장한다.[13]

바람의 검심》에서는 회상 장면에 등장하며, 사가라 사노스케 캐릭터의 영감이 되기도 했다.[13]

오토메 게임이자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박앵귀 신선조 기담》의 주요 등장인물이다.[13]

류가 고토쿠 스튜디오의 2014년 액션 어드벤처 게임 《용과 같이: 유신!》과 2023년 비디오 게임 리메이크에 단역으로 등장하며, 시리즈의 적대자인 아이자와 마사토와 외모와 목소리를 공유한다.

하라다 사노스케를 연기한 배우는 다음과 같다.

시기주요 활동
1863년로시구미 참가, 교토 상경. 미부 로시구미 결성, 신선조 창설
신선조 10번대 대장
타니 산주로 신선조에 소개
스가와라 마사와 결혼
세리자와 카모 암살 관여 (가능성)
우치야마 히코지로 암살
이케다야 사건
산조 세이사츠 사건
1867년 6월하타모토
1867년 12월사카모토 료마 암살 용의자 (불분명)
1867년 12월아부라노코지 사건
1868년 1월도바-후시미 전투
1868년 3월{{lang|ja|甲陽鎮撫隊|고요 친부타이|}
작품 종류배우 이름작품 제목
영화반준사부로유신의 교락 용의 권 호랑이의 권
니레이 코타로신선조
시나가와 류지장렬 신선조 막말의 동란
도모토 히로시신선조 시말기
오가타 신노스케신선조 혈풍록 곤도 이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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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노무라 겐지신선조 이문 PEACE MAKER#애니메이션
유사 코지박앵귀


5. 기타

하라다 사노스케는 우에노 전투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 니가타, 시모노세키, 부산을 거쳐 대륙으로 건너가 마적의 두목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25] 1907년경 에히메 신문에는 하라다가 동생이나 조카와 만나 대화한 후 "만주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25]

5. 1. 마적 전설

하라다는 1868년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중국으로 건너가 기마 도적단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다.[12] 청일 전쟁 당시 한 노인이 일본 제국 육군을 도왔고, 자신이 하라다 사노스케라고 주장했다는 보고가 있었다.[7] 이는 1965년 한 신문에 보도되었지만, 아직까지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다.

니가타, 시모노세키, 부산을 거쳐 대륙으로 건너가 마적의 두목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청일 전쟁러일 전쟁 때 마쓰야마에서 옛 이야기를 하는 노군인이 있어 "나는 하라다 사노스케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907년 (메이지 40년)경 에히메 신문에 따르면, 동생이나 조카와 만나 대화 후 "만주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보도되었지만 진위는 불명확하다.[25]

참조

[1] 문서 Ōishi, p. 29; Nakami, p. 51.
[2] 문서 Nakami, p. 51.
[3] 문서 Nakami, p. 51; Ōishi, p. 30.
[4] 문서 Ōishi, p. 160.
[5] 문서 Nakami, p. 186.
[6] 문서 Kusunoki, p. 92.
[7] 문서 Nakami, p. 52.
[8] 문서 Ōishi, p. 200
[9] 문서 Kikuchi, p. 228.
[10] 문서 Kikuchi, p. 229.
[11] 문서 Kikuchi, p. 230
[12] 문서 Nakami, p. 52. The term in Japanese is bazoku, literally, "horse-bandits".
[13] 서적 Rurouni Kenshin, Volume 2 https://archive.org/[...] Viz Media
[14] 서적 別冊宝島 2036号 新撰組“散り様”列伝 宝島社 2013-07
[15] 서적 史談会速記録
[16] 서적 浪士文久報国記事 http://worldcat.org/[...] Chukeishuppan 2013-09
[17] 문서 根岸友山御用留
[18] 서적 新選組遺聞
[19] 문서 新撰組永倉新八
[20] 문서 浪士文久報国記事
[21] 문서 「新撰組顛末記」では、左之助は土方隊に属したことになっている。近藤は永倉たちを率いて山頂に向かい、左之助たち土方隊は山の麓で待機していたという。
[22] 문서 新撰組始末記
[23] 서적 新選組十番隊組長 原田左之助
[24] 웹사이트 原田左之助(新撰組・十番隊組長) https://www.touken-w[...] ホームメイト 2024-07-05
[25] 서적 別冊宝島 2036号 新撰組“散り様”列伝 宝島社 2013-07
[26] 서적 別冊宝島 2036号 新撰組“散り様”列伝 宝島社 20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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